어제는 경찰청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김기범 교수님이 명예퇴임식을 했습니다. 민간인의 신분으로 돌아가 상아탑에서 학문의 업적을 쌓을 그분의 미래를 축복합니다.
존경하는 김기범 스장님.
제가 올해 꼭 가고 싶은 사이버 4대 행사가 있는데 RSA, 블랙햇, DCC, 그리고 스장님의 명예 퇴직식이었습니다. 그런데 요즘 같은 분위기에 한국을 다녀왔다가는 싱가포르 정부에서 당장 비자를 취소해 버릴 것 같은 느낌이라 스카이스캐너의 결제 화면에서 보름동안 주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. 제가 대한민국 경찰청에서 가장 좋아하고 최고로 존경하는 분이기에 그 자리를 함께 하고 싶었는데, 이만희 X새끼 땜에.. 함께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.
오늘 스장님의 좁은 어깨에 무궁화 4개가 간신히 올라간 것을 보니 왜 제가 뿌듯할까요? 요즘 같은 계급 정체의 시대에 총경 달기가, 대구 서문시장에서 마스크 구하기보다 더 어렵다는데, 명예퇴직이라는 창조적인 방법으로 그걸 이루시는 것을 보니 존경스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합니다. 그나저나 경찰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 이렇게 사라졌으니, 새로운 숙주를 찾아야 하는데.. 이번에는 고르고 골라 최소한 치안정감까지 갈 수 있는 분으로 갈아타도록 하겠습니다. 늘 그렇듯이 그렇게 높이 올라가는 사람이 좀 모질고 힘들더라도..
2010년 국제협력을 해보겠냐고 구슬리는 말에 러시아 가서 해커 잡고, 베이징 가서 피싱사범 잡을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사이버테러대응센터에 들어왔는데, 발령난 첫날 퀴즈대한민국 퀴즈영웅 출신이라는 제 스펙을 보고 바로 인사발령을 뒤집어 저를 서무주임이라는 고난의 길로 이끄신 것을 기억하십니까? 제 경찰 인생에 최고 극한의 시기였지만, 그 덕분에 이렇게 살 필요 없고 재밌게 살자는 인생관을 갖게 해 준 의미 깊은 시간입니다.
아침 7시에 출근해서 밤 11시에 퇴근해야 했던 그 시절.. 출퇴근 시간 허비하며 집에 가서 잠만 자고 올 바엔 그냥 사무실에서 먹고 자며 사는게 편하겠다 싶어 자포자기하고 살고 있는 저에게 항상 미근동에서 5년만 버티면 넌 어마어마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하시길래 그 말만 믿고 진짜로 승진 공부는 생각지도 않고 무조건 버티기만 했던 시간이 있습니다. 아이고 피 같은 내 젊음이여.. 5년은 유통기한을 넘겨 6년이 되었고, 그냥 방치하면 사무실 지박령이 될까봐 걱정했던 분들 덕분에 간신히 본청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. 그러나 그 때 배웠던 이런저런 경험과 지식들 덕분에 지금 있는 곳에서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.
그래도 제 기억에 스장님은 항상 자신이 속한 조직의 파이를 키우기 위해 고민하고 헌신하는 분이었습니다. 초코파이를 겁나 큰 케익으로 불렸으면 반 정도는 떼어가며 지분을 주장할 법도 한데, 우리 스장님은 항상 주위에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눠가며 배불리 먹이려고 했던 분입니다. 인간에 대한 애정이 강하고, 학문에 대한 열정도 깊었구요. 그 와중에 두산 베어스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한국시리즈 티켓 챙기신다고 저와 인터파크에서 광클하던 분이셨죠.
제가 항상 아쉬운 것은 한번도 스장님께, '선배님' '반장님' '교수님' '슨상님'이라고만 불렀지 형이라고 불러본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. 물론 저 같은 것을 동생으로 두기에는 본인의 그릇이 작음을 알고 스스로 물리신 면도 있겠지만, 생각해보니 나름 섭섭하고 아쉬운 부분입니다. 하지만, 실제 나이차도 많고 사람들이 보기에도 외모상 간극이 크기에 차마 형이라고 부르는 것은 제가 손해인 것 같습니다. 그래서 앞으로 둘만 있는 자리에서는 '삼촌'이라고 부르겠습니다.
생각나는대로 이것저것 쓰다보니 명예퇴임을 축하한다기보다는 어디 멀리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올리는 추모글처럼 되어버렸네요. 어쨌든 한국에서 누구나 가고 싶어한다는 SKY 중 하나이자, 차기 유력 대권주자인 분이 나왔다는 성균관대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시게 되어 너무 기쁘게 생각하고, 종종 대학로 가면 동네 맛집인 봉자네 떡볶이에서 튀김이랑 순대 곁들여서 배불리 먹여주시길 바랍니다. 대학 후드티나 자켓 이쁜거 나오면 좀 챙겨주시고, 종종 연사로 불러 비행기표도 좀 챙겨 주십시오.
제가 엄청 존경하고 우러러 보는거 아시죠? 항상 건강하시고, 행복한 일들만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. 사이버 1인자 김기범이 떠난 자리는 제가 알아서 잘 채울테니 걱정말고 떠나십시오. 사랑합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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